폭싹 속았수다 16화 폭싹 속았수다

드디어 숲속 종소리가

춤을 추기 시작했다

카드 소리와 함께

돌밭을 일구던 나의 성실한 부모는

랜드마크를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었다

나는 애만 보고

엄마는 나만 봤다

내 딸 표정은 천 개를 알면서

엄마의 표정들은

많이 떠오르지를 않았다

그때는 몰랐다

사진에 남은 어색한 얼굴들로만

엄마를 기억하게 될 날이

오는 줄은 몰랐다

엄마의 딸이

또 엄마가 되어 갔다

아이를 품은 딸의 시간이

너무 고되지 않기를

엄마는 사는 내내

자기 시간을 잘라다 붙였다

스물 네 번의 항암은

무쇠를 녹였다

엄마는 계절을 잊었다

바당 나가 맨날 울던 해녀 딸에서

세상 챙피한 것도

그렇게 많던 문학소녀에

미치고 팔짝 뛰게 좋던 선장 마누라에

오 계장에

시장통 생선 아줌마에다

나이 일흔에

선생님 소리를 다 듣고

이제 오애순 시인까지 해

인생 진짜 ‘고’ 해 봐야 아는 거지

중간에 때려쳤으면 어쩔 뻔했어

살아 보기를 천만 잘했지

(그래서 엄마는 지금 또 봄이야?)

또 봄이지, 봄

인생이

봄, 여름, 가을, 겨울로

가는 줄 알았더니

아니야

그냥 때때로 겨울이고

때때로 봄이었던 거 같애

수만 날이 봄이었더라

칠십 년의 별들이 모여

은하수가 되었다

반짝반짝한 순간들이

너무 많았어, 너무

칠십 년짜리 꽃동산이

여기 다 들었다

가슴에 묻어 온 무수한 것들이

비로소 만개했다

엄마는 지금

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있다

오로지 당신께,

아홉 살적부터 여적지.

당신 덕에 나 인생이 만날 봄이었습니다.

당신 없었으면 없었을 책입니다.

다시 만날 봄까지.

만날 봄인 듯 살겠습니다.

너무나 어렸고,

여전히 여린 그들의 계절에

미안함과 감사, 깊은 존경을 담아.

폭싹 속았수다.